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범 김구 암살 사건 (문단 편집) == 사건 이후 == [[안두희]]는 경교장을 빠져나가다가 경교장 경비들에게 잡혀서 헌병사령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김구가 남북 협상을 통해서 정치 사회에 혼란을 주고 [[공산주의자]]들을 자극시키고 찬동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면서 결국엔 참다 못해 김구를 죽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형기가 15년으로 감형되었다. 이때 총성을 들은 비서진들이 서재로 달려가 보니 김구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김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여론은 깊은 애도를 표명하였다. 김구 암살 후 장례식까지 10일 간 다녀간 조문객은 약 120여 만 명으로 추산되었고,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문상객도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도 김구 암살 이후 6월 28일, 7월 2일의 두 차례에 걸쳐 성명을 발표했다.[[http://xn--zb0bnwy6egumoslu1g.com/bbs/board.php?bo_table=reference&wr_id=23|김구 선생 급서에 통탄불금 (1949년 6월 28일)]] 장례식이 있던 7월 5일 서울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약 40∼50만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각각 수만 명씩이 모여 고인을 애도하였다. [[https://welifelove.tistory.com/m/16056561|시신에 염을 하는 모습과 조문 인파를 담은 사진들]][*2 해당 사진들은 미국 <라이프> 지 기자 칼 마이던스(1907~2004)가 찍었다.] 사건 발생 1시간 24분만에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이 이 사건은 안두희 개인의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했으며 [[이승만]] 역시 이 사건이 한독당 내부의 집안싸움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 등이 살인교사 같은 누명을 쓰고 구속됐다. 안두희 역시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김구와 의견 충돌을 벌이다가 죽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1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형집행정지]]로 석방시켜 군에 복귀시켰고 정치권 일각에서 석방 논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자 계급을 [[소위]]에서 [[소령]]으로 [[특진]]시켰다. 결국 안두희는 재판 중 2계급 특진을 하였고, 사건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특혜를 받았다.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장흥(독립운동가)|장흥]]은 한독당 계열로 몰려 헌병사령관직에서 물러나고 전봉덕에게 사령관직을 넘겼다. 사령관직에서 물러난 직후 [[김창룡]]에게 조사를 받았는데 왜 안두희를 바로 영창에 구금했는지, 그리고 한독당 비밀당원인지의 여부를 추궁받았다고 한다. 예편 후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군]]으로 건너가 군납공장을 차려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정권의 비호로 대저택까지 지어 떵떵거렸다. 김구 살해 진상규명은 1960년 [[4.19 혁명]] 이후에 진행되었는데 4월 29일에 한 시민이 안두희의 체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게 신호탄이었고 같은 날 안두희의 집도 분노한 학생들에 의해 파괴됐다. 이 시기부터 진상규명 운동이 벌어져 6월 26일에 심산 [[김창숙]]이 백범 사망 11주기 추모식장에서 "선생을 저격한 안두희를 죽여라! 그리고 그 배후 조종자인 이승만을 규탄하자!"고 절규했다. 이에 안두희는 잠적했다가 1961년 4월 17일 '백범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았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다. 동월 28일에 효창공원에서 열린 '백범 암살사건 배후자 규탄대회'에서 시민 3,000여명이 국회의사당까지 가서 가두시위를 벌였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도로아미타불이 됐다. 그럼에도 안두희는 세인들에게 김구 암살범이라는 낙인을 받아 수차례 암살 및 살해 위협을 받아왔고 1987년부터 민족정기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수차례 응징당하며 진실을 고백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여기서 안두희는 이승만의 명령을 받아 김구를 암살했다고 얘기한 적이 있으나 이후 권중희의 납치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부인하였다. 1992년에야 암살과 관련된 증언을 시작했고 백범 묘소에도 참배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본인 단독 범행이라고 얘기했으며, 언론사 인터뷰에서는 김창룡의 명령을 받았다고 얘기하기도 하고, 미국이 시킨 일이라고 얘기하기도 하는 등 말을 자주 바꿨다. 1993년에 국회 법사위가 '백범김구암살진상규명소위원회'를 구성했고 1994년에는 안두희가 건강 악화로 들것에 실린 채 해당 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출석했으나 이승만과의 관계 등 배후세력에 대해선 실어증을 이유로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소위 측은 2년여 간의 조사 후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내고 1995년 12월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보고서는 김구 암살 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사건으로 보고 있다.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인천 신흥동 자택에서 버스기사 [[박기서]]가 휘두른 정의봉[* 정말로 몽둥이 이름이 정의봉이다.]에 두들겨 맞아 죽는 [[안두희 피살 사건|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에 따라 당사자인 안두희도 사망하면서 이 사건은 현재까지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